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라 놓지 못해서다

  상담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날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는 것이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나고 건넨 짧은 말 한마디, 가볍게 웃고 지나간 대화였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 장면에 붙잡혀버린다. 집에 돌아와 누운 뒤부터 그 한 문장이 반복된다. “내가 너무 가볍게 보였을까”, “불편했나” 같은 생각이 이어지면서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다. 대화 중 스쳐 지나간…

나는 여전히 순진하기로 했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면 가사 속에 담긴 말들이 참 곱고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음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잘 몰랐지만, 그 청아한 단어들을 소리 낼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지는 느낌이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문득 어린 시절 부르던 찬송가 가사가 입안에 맴돌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마도 그 노랫말들이 내가 세상을…

세계는 다시 부족으로 돌아가고 있다

  긴장감, 요즘 세계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감정이다. 전쟁은 멀리서 벌어지고 있지만 불안은 일상 가까이까지 들어와 있다. 나는 지금까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부터 전쟁이 마치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공기 자체가 달라진 듯하다. 이런 긴장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편을 찾는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등을 돌린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슬픔

  한 선교사 부부가 동남아시아의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무리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현지인들은 따뜻했고 아이들도 나름 잘 적응해 갔다. 파송 교회와는 화상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선교지 상황을 보고하고 사진도 올리고 기도 제목도 나누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그런데 아내 선교사가 상담 자리에서 이렇게 마음을…

터널 끝에서 몇 걸음

  터널 끝에서 이제 겨우 몇 걸음 걸어 나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완전히 밝은 곳에 선 것도 아니고 아직 어둠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닌 자리다. 숨쉬기는 조금 편해졌지만 몸에는 아직 긴장이 남아 있어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몇 달 전 이 내담자가 처음 상담실을 찾아왔을 때, 그는 의자 끝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삶에 앉아 있지 못한 사람들

  상담실에서 사람을 마주하다 보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그 사람이 자기 삶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누가 보아도 반듯한 인상의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랬다. 말끔했다. 옷차림도 말의 속도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질문을 던지면 잠시 생각한 뒤 정리된 문장으로 대답했다. 감정은 있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이중적인가

  자기 모순을 마주하는 순간만큼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경험도 드물다. 말로는 그렇게 믿는다고 해놓고 정작 상황이 닥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생각과 말, 신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들이다. 우리는 대개 그 불일치를 적당히 봉합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자녀나 가족 앞에서는 봉합이 쉽게 풀려버린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가장 숨기고 싶던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AI의 자리 사람의 자리

  ‘돌본다’라는 말이 요즘처럼 무게감 있게 다가온 적이 있을까. 가족으로부터 시작해 가까운 지인, 상담의 구조,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이 돌봄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하기에 누가 누구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무거운 숙제처럼 다가온다. 심리 및 정신건강 분야에 인공지능(AI)의 역할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불안을 예측하고, 우울 점수를 계산하며, 자살 위험 신호를…

배려라는 이름의 침묵

  일상에서 종종 망설이게 되는 사소한 순간이 있다.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을 때이다. 그 망설임은 대개 배려라는 이름으로 시작된다. 괜히 무례해 보일까 봐,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될까 봐,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것은 상대를 보호하기보다는 내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한 결정인 경우가 많다. 말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