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다이어트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끊어내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줄줄이 이어진 단톡방에서 탈퇴하고 연락처를 정리하고 모임 횟수를 줄이는 식이다. 하지만 관계를 다이어트 한다는 것은 몸무게를 줄이는 것처럼 숫자를 줄인다기보다는 혈액순환의 개념에 가깝다. 핵심은 흐름을 회복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리를 바로잡는 차원이다.
몸은 살이 조금 쪄도 혈액이 잘 돌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혈관이 막히면 생명이 위태롭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수십 명과 연락하며 시간을 보내도 정작 마음의 피가 돌지 않는다면, 영혼은 숨을 쉬지 못한다. 반대로 단 한 사람이더라도 그와 진실하게 연결된다면, 그 한 줄기의 관계가 온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저는 주변에 사람도 많고 모임도 많은데 왜 이렇게 외로운 걸까요?” 모임 일정이 빽빽하고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쏟아지지만, 그 안에는 흐름이 없다. 서로의 영혼을 맑게 흐르게 하는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숫자는 많지만 혈관은 막혀 있는 상태다. 관계의 다이어트란 결국 사람을 덜어내는 일이 아니라 막힌 관계를 정리하고 흐름을 되살리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이어트가 반드시 절교 선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관계는 아예 끊어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마음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늘 요구만 쏟아내고 내 시간을 잠식하는 사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삶의 균형은 이미 무너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나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이어가는 관계는 서로를 지치게 만들 뿐,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이 지점을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고 말한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곧 마음의 혈관을 지키는 일이다. 불필요한 부담을 덜어내고 맑게 흐르는 관계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영혼을 건강하게 한다.
경계(boundary)는 차단이 아니라 건강한 출입문이다. 들어와야 할 사람과 잠시 거리를 둬야 할 사람을 구분하는 문지기다.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은 자신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진짜 필요한 이들과의 만남까지 앗아가 버린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분명한 관계의 질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든 무리를 똑같이 대하지도 않으셨다. 열두 제자와는 특별히 시간을 나누셨고 그 가운데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는 더 깊은 순간들을 함께하셨다. 변화산에 데리고 가신 것도,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를 나누신 것도 이 세 제자였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지 않았다. 누구를 가까이 두고 누구와는 거리를 두실지 분명히 분별하셨다. 관계에도 집중과 절제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관계를 무조건 늘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막혀 있는 관계를 억지로 붙들고 있으면 내면의 혈관은 점점 탁해진다. 또 소중한 사람을 뒷자리에 세워둔 채,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관계를 앞자리에 앉혀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관계의 다이어트는 결국 내 곁에서 누구를 더 깊이 품을 것인가, 누구와는 적절한 거리를 둘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지금 내 삶에서 순환을 막고 있는 관계는 무엇인가. 또 내 마음의 앞자리에 앉혀야 하지만 늘 뒷자리에 밀려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다시 호흡할 수 있다. 관계의 다이어트는 결국 내 영혼을 살리는 응급처치이자 진짜 관계를 지켜내는 용기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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