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면 가사 속에 담긴 말들이 참 곱고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음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잘 몰랐지만, 그 청아한 단어들을 소리 낼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지는 느낌이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문득 어린 시절 부르던 찬송가 가사가 입안에 맴돌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마도 그 노랫말들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가끔 나는 왜 이렇게 순진하냐는 말을 듣곤 한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이거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다. 어리숙하고 답답하다는 평가가 따라붙기도 한다. 그런 말을 의식해 순진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려 애쓴 적도 있다. 아는 척을 하고, 말을 많이 하고, 상황을 한발 앞서 계산하는 척도 해보았다.
그러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건조해졌고, 사람을 진솔하게 만나기보다 먼저 의심부터 하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결국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말하고, 사람을 너무 빠르게 재단하지 않는 태도로 말이다.
순진하게 사는 삶은 정말 어리석은 일일까. 너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금세 흩어지는 꽃잎처럼 살기보다, 너무 단단한 껍질을 두르고 속을 감춘 채 살아가기보다, 조금 더 여리고 투명한 쪽을 택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선택일까.
지난 가을,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말로 가해지는 폭력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너무 쉽게 말 위에 말을 얹고,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잣대를 적용하면서 타인에게는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는 장면들도 보게 되었다. 설명할 기회조차 없이 판단이 내려지는 상황 속에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의 삶을 흔드는지 알게 되었다. 그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상담의 자리에서는 이런 상처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관계 속에서 오해를 겪고, 근거 없는 소문에 휘말리며, 반복되는 비난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사람들. 특히 세상을 믿어보려 했던 여리고 약한 이들이 더 많이 다친다. 말의 이면을 계산하기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던 이들이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리다.
세상은 점점 계산에 능한 사람을 요구한다. 상황을 읽고 의도를 파악하며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을 하는 능력 말이다. 그것은 분명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이다. 그러나 그 기술만으로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 계산이 앞서면 관계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게 하지는 못한다.
여리고 순진한 태도 안에는 인간다움의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 타인을 믿어보려는 용기, 아직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는 태도, 상대의 말을 먼저 들어보려는 자세. 완벽하지는 않지만 관계는 늘 그런 데서 시작되고 깊어진다.
상담실에 찾아온 이들 앞에서만큼은 사람을 믿어보려는 태도를 놓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순진함이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고 현실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이 다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런 시선 하나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수없이 재단당한 사람에게는 단 한 번이라도 계산하지 않는 눈으로 바라봐 주는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순진하다는 말을 듣는 삶을 택하려 한다. 세상이 점점 더 빠르게 판단하고 계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조금 더 느리게 사람을 바라보고 싶다. 조금 더 어리숙한 눈으로 사람을 믿는 삶을 택하고 싶다.
어린 시절 부르던 찬송가의 곱디고운 말들이 아직 입안에 맴도는 것처럼, 그렇게 부드러운 언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순진함은 버려야 할 미숙함이 아니다. 내가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삶의 태도일 뿐이다.
김화순 소장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심리상담센터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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