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면서 몇 번이나 되뇌이는 말이 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정말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기쁨보다 고통이 유난히 컸던 날들,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했던 시간들, 마음속에서 수없이 고쳐 쓴 장면들. 삶은 편집의 권한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살아버린 날들은 수정도, 삭제도 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삶의 순간들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먼저 밀고 들어왔고 그 와중에 그저 버티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넘겨왔다. 어떤 날들은 살아냈다기보다 살아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의지보다 생존이 앞섰고 선택보다 반응하는 게 급했다.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채 삶의 한가운데로 던져지곤 했다.
대체로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지나간 날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 왜 그 말을 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그때는 조금 더 기다리지 못했을까. 반성은 후회로 이어지고 후회는 바닥을 치며 우울을 불러온다. 너는 안 된다는 내면의 속삭임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하고 때로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날의 나는 그날의 힘과 그날의 지혜로밖에 살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인정하는 것이다.
연말이다. 이런 마음들을 끄집어내어 바라보고 동시에 보듬어주라고 말해주는 계절이다. 모두가 성과와 업적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한 해를 살아내지 못했다. 소중한 관계를 잃은 사람도 있고,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사람도 있으며, 몸이 먼저 무너지고 뒤늦게 경고를 알아차린 사람도 있다. 수직적인 성공이 꿰어지는 삶이 아니라 유지와 중단과 재시작이 겹겹이 이어지는 파동처럼 흘러온 삶이다. 그래서일까, 흔들림은 실패가 아니라 어쩌면 살아있다는 증거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낸 시간을 직선으로 재지 않으신다. 더 멀리 나아간 사람이라고 특별히 더 기뻐하지 않으시고, 넘어진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다고 꾸짖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멈춰 선 이에게 손을 내밀고 다시 걷고자 하는 이에게 숨을 고를 시간을 주신다. 과거의 실수를 들춰내는 분이 아니라 그 무게를 다른 의미로 읽어낼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사건 자체를 바꾸시지 않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으신다.
받은 상처를 제거한다고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새로운 이야기 속에 배치할 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 지워진 상처보다 정리된 상처가 힘을 갖는 이유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은 그대로 두자. 남아 있는 날들을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정성스럽게 가꾸고, 너무 늦게 알아차린 마음에게도 그렇게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자. 미처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 더 부드러운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자. 그것이 삶을 재정렬하는 방식이다.
살아버린 날들은 수정이 안되지만 남아 있는 날들은 언제든 새로 쓸 수 있다. 그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소망이고, 회복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적절한 노력이다. 무엇보다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갈 주체는 실패한 내가 아니라, 그 실패를 지나면서 조금 더 단단해진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연말이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나간 날들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내일의 자리에는 우리 몫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김화순 소장∥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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