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들 결정장애라는 말을 한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미루는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며,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정하지 못하고 보류하고 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는 미완성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결론에도 장애라는 말을 붙이나 싶어 간과하고 흘려보내던 단어였지만, 마음의 임시 거처에 놓여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말이 사용되는 이유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실제로 많은 경우 문제는 결정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직 그 선택을 감당할 정서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선택 이전에 처리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쉽게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마음은 늘 애매하다. 아프다고 말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고, 괜찮다고 넘기기에는 분명 무겁다. 정리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손이 가지 않고, 떠나야 할 자리인 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우유부단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처리 과정이다. 겉으로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장면이 남아있는 상태다. 그 장면을 충분히 통과하지 않은 채 다음 선택으로 넘어가려 할 때, 마음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에는 큰 변화가 없고 결정을 미룬다고 당장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계속 불편하다. 결론을 내리려 하면 이유 없는 피로가 밀려오고 그 문제를 떠올릴수록 생각이 흐릿해진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삶의 한 국면을 정리하는 중요한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슬퍼하지 않은 이별은 다른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충분히 분노하지 못한 상처는 무기력이라는 형태로 돌아온다. 마음이 결론을 유예하는 데에는 대개 스스로를 함부로 다루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다.
신앙의 자리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믿음은 분명해야 하고 태도는 단정해야 하며 질문과 의문은 빠르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믿음의 여정은 대부분 결론 이전의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부름을 받았으나 곧바로 떠나지 못했고, 약속을 들었으나 여전히 광야를 걸었으며, 응답 대신 침묵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잘 모르겠다”는 말이 늘어나는 현상 역시 퇴보의 신호로만 볼 수는 없다. 삶이 조금 더 정직해졌다는 징후일 수 있다. 확신이 흔들릴수록 사람은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된다. 단정 대신 관찰을 선택하고, 결론 대신 유예를 택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자기 속도를 회복해 간다.
결론 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일은 분명 불편하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타인과 공유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빠르게 정리되는 시대일수록, 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삶을 얕아지지 않게 붙잡아 준다. 쉽게 정의되지 않는 감정은 타인의 속도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게 만든다.
어쩌면 지금은 답을 내려야 할 시점이 아닐 수도 있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정리하기보다 질문을 품은 채 살아도 되는 국면이다. 아직 말이 되지 않는 감정들을 억지로 문장으로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결론을 유예하는 태도는 삶을 성급하게 소모하지 않겠다는, 삶을 함부로 다루지 않겠다는 성숙한 방식이기도 하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미완의 자리에서 하루를 건너고 있다. 그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다.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김화순 소장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심리상담센터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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