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이른 시기에 배워야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청소년 따돌림과 자살, 매일같이 불거지는 각종 사회 부조리 등은 공감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청소년과 노인 및 사회 지도층의 잘못된 일탈행위는 관련되는 사람들과 공감이 안 되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4월에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 많다. 따스한 봄 햇살을 누리면서 지나간 겨울을 기억해야 하고, 그루터기의 새싹을 보면서 잘려진 나무를 기억해야 하고, 찬란한 부활을 얻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힌 손과 발을 기억해야 한다.
공감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은 적정 수준의 자기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애의 정도가 적정 수준이 아니면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되거나 혹은 우울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신화 속의 나르키소스처럼 주위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인다. 또 우울한 사람은 생활에 활력이 없고 자살충동에 휘말리곤 한다.
공감은 가능하면 인생의 이른 시기에 배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은 정서적, 인지적, 그리고 행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성장한 사람은 공감할 줄 모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공감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연스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것이 친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추측해 볼 수 있다. 공감할 줄 알면 개인적으로 행복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회 및 국가도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협력(Collaboration)과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다른 사람들과 지식을 공유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핵심역량이다. 대인관계에서 타인의 정서를 이해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공감 능력은 앞으로 더욱 강조될 것이다. 특히 유아기 타인과의 성공적인 상호작용 경험은 긍정적 대인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어 이후의 사회성 발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수님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4:24-25)라고 말씀하셨다. 헤아린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평가한 그대로 평가받게 된다는 말씀을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인이 떠나면서 맡겨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을 주인은 내쫓아버렸다.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잘못 헤아렸기 때문이다. 같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 두 명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그 종은 주인을 착취하고 빼앗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주인을 판단한 그대로 평가받아 쫓겨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공감할 줄 모르면 본인이 개인적으로 불행할 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도 불행하게 된다. 공감은 자신의 영역을 초월하는 경험이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야 공감의 감정을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공감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에서 일어난다.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어려운 감정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교회에서, 우리 사회의 전 영역에서 공감 능력이 향상되어야 함을 예수님은 이미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이 봄,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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