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그렇듯 뉴스를 켜면 한숨부터 나온다. 정치권은 대의를 말하면서도 결국 자기 편의 유불리만을 따지고, 교회의 지도자들조차 공동체보다 자신의 자리를 더 지키려 한다. 사랑했던 사람들조차도 어느 순간 자기 생존의 본능 앞에서 관계를 쉽게 내던진다. 살아보면 볼수록 삶은 참 야속하고 허망하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물가가 내려간다 하지만 정작 장바구니 물가는 여전히 무겁다. 마트에서 카드를 긁고 나오면 손에 든 건 몇 개 안되는데, 결제 금액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 청년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를 해도 안정된 일자리를 잡기 어렵고, 가까스로 취업을 해도 대출과 생활비에 허덕이다 보면 미래를 그릴 여력이 없다. 그러나 사회와 정치의 대책은 근본적이지 않다. 지금의 불만을 잠시 덮는 임시방편이 대부분일 뿐이다. 그 사이에 사람들의 일상은 더 팍팍해진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막상 돌아보면 나아진 건 하나도 없다는 체감뿐이다.
사적인 관계도 다르지 않다.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내가 살아야겠다”는 이유로 등을 돌릴 때가 있다. 의리와 사랑이라는 단어는 허공에 흩어지고, 서로에게 남는 건 배신감과 허무뿐이다. 그럴 때 사람은 더 이상 누군가를 쉽게 믿을 수 없게 된다. 믿었던 관계가 흔들릴 때 삶 전체가 균열이 나는 듯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안과 맞물려 개인적 상실까지 겹치면, 허망함은 배가 된다.
나는 이런 현실 앞에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마음이 드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마음조차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세상이 늘 아름답게만 보일 수는 없고, 교회가 언제나 순결하게만 남아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허망함 속에서도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신다. 나는 기도의 자리에서 허망하다고만 여겼던 그 마음이 사실은 하나님께 손 내미는 자리일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깨달았다. 허술한 인간의 약속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허망함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경험이다.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 보이고, 관계도 일도 붙잡을 힘이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럴 때 흔히 ‘나만 이렇게 힘든가?’라는 고립감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사실 허망함은 보편적이고, 삶의 한 부분이다. 이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억누를 필요는 없다.
또한 허망함은 때로 우리를 멈추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끊임없이 달려가기만 하면 결코 보이지 않던 공허와 상처, 바로 그 멈춘 자리에서 그것들은 더 확연히 드러난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들도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앉길 주저했는데, 막상 앉아보니 비로소 제 마음이 보였어요”라고 말하곤 한다. 허망함은 고통스럽지만 자기 내면을 마주하는 절대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 허망함을 혼자 짊어지지 말고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을 필요도 있다. 마음의 무게는 나눌 때 비로소 가벼워지는 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혼자 감당하려 하면 더 깊이 침잠하지만, 안전한 관계 속에서 나눌 때 다시 살아날 힘을 얻게 된다. 누군가 옆에서 함께 걸어줄 때 그 길은 덜 어둡고 덜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허망함을 나눌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이 마음을 내어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는 건, 억지로 희망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 허망함의 자리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함께 바라보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는 아주 작은 위안을 나누는 것, 어쩌면 신앙도 거기서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바닥에서 드러나는 민낯이 곧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이 되기도 하니까.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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