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참 많다. 열심히 준비한 일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기도 하고, 옳다고 믿은 일이 도리어 외면받기도 한다. 애쓴 만큼의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 때 마음이 복잡해진다. 슬프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절망스럽지는 않고, 화가 나지만 또 한편으론 후련한 감정들이다. 슬픔과 분노, 허무와 안도가 서로 밀고 당기며 마음 안에서 자리 다툼을 벌이는 듯하다. 서로 상충된 감정들이 한 마음 안에서 공존하는 것을 인지적 부조화라 부르지만, 신앙의 언어로는 ‘은총의 아이러니’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추진하던 일이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오랜 시간 애써주고 함께 힘을 모아준 분들을 생각하니 송구했고, 한껏 고양되어 있던 마음들을 떠올리니 아찔하기도 했다. 위로의 전화가 이어졌다. “어쩌면 좋아요.” “그동안 애쓴 게 다 허무하겠어요.” “다음엔 꼭 잘될 거에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나 대신 화를 내주고, 나보다 더 분노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정작 나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슬프거나 절망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묘한 평정이 찾아왔다. 아마도 버거운 짐을 밀며 달려왔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통과된 뒤의 큰 무게를 미리 짐작했던 탓일 것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끝이 아니라 잠시의 멈춤이었다. 나는 그 멈춤 안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걸어갈 방향을 정돈했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고, 눈물이 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태,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 문득 독일 희극배우 카를 발렌틴의 말을 만났다.
“모든 것에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코믹함의 세 가지 면이 있다.”
그의 말을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건에는 긍정과 부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보게 만드는 ‘아이러니’의 면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을 긍정과 부정 둘 중 하나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성공과 실패, 통과와 부결. 그러나 인생의 사건에는 언제나 제3의 면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는 모순을 견디는 인간의 품격이다. 패배 속에서도 후련함을 느끼고 눈물 속에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 무너진 자리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이다. 그 모순된 감정 속에서 인간됨의 깊이를 배운다. 아이러니는 인생의 부조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게 하는 은총의 시선이자 살아내는 기술이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정의 사건 속에서도 오히려 자유로워진 긍정의 느낌이 있었다. 두 감정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균형이 바로 아이러니다.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때, 절망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웃음은 신앙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다. 모든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쉽게 부서진다. 하지만 한 발 조금 물러서서 그 안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면 여전히 웃으며 걸어갈 수 있다.
분노와 허무 사이에서 피어나는 웃음은 냉소가 아니라 은총의 신호다. 아마 하나님은 때로 부결과 같은 일들을 통해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신다. “이젠 내려놓아라,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라.” 그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 때때로 찾아오는 부득이한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돌봄의 또 다른 형태이고, 닫힌 문은 절망이 아니라 보호일 수 있다. 단단한 신앙은 바로 이런 역설을 견디는 힘에서 자라난다.
인생의 모든 일에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그 둘을 감싸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 이름이 은총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웃는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나를 살릴 것을 알기에, 그 웃음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꽉 붙들고 계심을 느낀다.
김화순 소장∥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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