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인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5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불과 0.73%포인트 차이로 이긴 상황에 어떠한 양상이든 대립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 조심스럽게 예견하면서, 새 정권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국민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세대 포위론’과 남녀 ‘갈라치기’ 전략이 실패했다는 비판이다.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선인은 20대 이하 남성에서 58.7%로 크게 앞섰지만, 20대 이하 여성에서는 33.8%로 2위 후보의 58%에 비해 열세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20대 남성을 지칭하는 ‘이대남’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당 대표는 페미니스트를 대표했던 여성의 선대위 영입을 반대한 바가 있고 여성가족부 폐지도 주장한 바가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여성혐오를 일으켜 갈라치기 한 문제는 윤석열 정권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선거 캠페인에서 노골적인 반여성 행보를 보이는 바람에 외신에서는 이미 그를 ‘안티페미니스트’, ‘여성혐오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혐오’라는 용어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감정이나 우발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혐오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혐오하는 자로서의 다수자 내면에 고착되어 있는 혐오 대상이 되는 특정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에 의해서 발현되는 증상이다.
“조선인이 후쿠시마 우물에 독을 타는 것을 보았다”는 표현은 2011년 2월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강진이 발생한 직후 한 일본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게재한 것이다. 이 표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혐한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혐오표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일제 강점기인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대량 학살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조선인을 학살하도록 선동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랫동안 학습된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이고 차별적 인식 틀, 즉 편견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혐오가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를 안다. 혐오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을 유발하거나 조장하고 심지어 증오범죄를 유발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위기나 감염병 위기와 같이 사회적 위기감이 고조될 때, 혐오의 위험성은 극대화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희생양을 요구했고, 혐오가 그 희생 제물을 공급해 왔다는 것을 인류 역사가 증언한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언제나 위험한 사람이거나 사회의 건강한 질서를 해칠 수 있는 사람들로 여겨졌고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장차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도덕적으로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감정이기까지 하다.
혐오 현상들을 그런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대개 무지에 의지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혐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혐오가 사회적 행위인 동시에 개인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삶의 조건으로 주어진 시대라고 해서, 주어진 차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끊이지 않는 분쟁과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차별과 증오범죄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현실은 다양성의 시대라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이제 새로운 5년의 출발, 서로 다른 인간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들이 삶의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차이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인가? 공존의 방향으로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차별과 배제로 응답할 것인가?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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