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에 서 있었다. 한때 아름다운 꽃과 건강한 나무들로 가득했던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갔다. 가지들은 엉켜버렸고 일부 나무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기 시작했다. 가시는 본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 가시는 다른 나무들의 성장을 막고 새들이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원은 더 이상 생명을 품는 곳이 아니라 고립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한때 생명력 넘쳤던 정원은 이제 서로를 경계하는 나무들과 메말라 가는 땅만이 남았다.
신앙도 이와 비슷한 길을 갈 수 있다. 생명을 품고 자라던 신앙이 어느 순간부터 외부를 경계하고 방어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생명을 주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려는 가시덤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시덤불 속에서는 나무가 자랄 공간이 없고 꽃이 필 여유도 없다. 그 안에서는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배제하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경직된 기준을 세우며,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짓는 신앙이 자리 잡는다. 이러한 변화는 신앙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반응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외부와 단절된 채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신앙은 본디 생명을 품고 성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람이 스치고, 새들이 날아들고,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강한 신앙의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곁에 어린아이를 세우시며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경계를 세우기보다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손을 내밀고 함께 나누려 한다. 신앙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틀에 갇혀 경직된 신앙이 아니라 바람이 통하고 생명이 흐를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신앙은 서로의 경험을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한다. 이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원리와도 닿아 있다. 신앙은 독단적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과 관점을 나누는 대화를 통해 깊어진다. 마치 정원 속 나무들이 서로의 뿌리를 연결하며 함께 성장하듯 신앙도 다양한 만남과 소통 속에서 풍성해질 수 있다. 신앙 공동체가 단 하나의 신학적 입장만을 강조하며 다른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가시덤불처럼 점점 고립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서로의 경험을 경청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신앙은 더욱 풍성하고 깊어질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 하다가 스스로를 닫아버리기도 한다.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기보다 익숙한 틀 안에 머물러 있으려 하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 나의 생각을 고수하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무는 가지를 뻗어야 성장하고 정원은 다양한 꽃과 나무가 어우러질 때 더욱 아름다워진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떤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시를 키우기보다 더 넓은 그늘을 만들고 더 많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정원으로 가꾸어야 할 때다. 너무 단단히 닫혀 있어 도무지 열 수 없는 문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본다. 나만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자라고 서로를 살리는 것이 되려면 어떤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지금은 마음을 열고 다시 햇빛을 향해 가지를 뻗어야 할 때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품기 위해 틀을 더욱 넓혀야 한다. 열린 정원이 많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것처럼 열린 신앙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 가시덤불처럼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품고 함께 자라는 울창한 정원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화순 소장∥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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