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고요하다
서울 시내의 모 병원에서 실습을 하던 중에 코마상태로 누워있는 고등학생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다. 환자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서울의 병원까지 와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보호자인 어머니와 나는 매주 한 번씩 병상에 마주 앉아 환자의 반응 없는 발을 주무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이 마를 만큼 울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치료해 주실 것을 믿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노라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여러 차례 만났지만 끝내 학생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다.
삶은 때로 나 자신의 통제 너머의 것이 된다.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더 높고 더 멋진 곳으로 날아오르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의 노력을 물에 생긴 거품처럼 흩날려 버린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나를 향해서만 음모를 꾸미기라도 하듯 거칠게 달려든다. 사람들은 삶의 지혜에 이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갖가지 방법으로 지혜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그러나 지혜에 이르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생의 최고봉을 맛보다가 어느 순간 가장 처참한 실패를 경험하고,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전부 맛보고 난 후에야 주어진 삶을 묵묵하게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지혜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다. 삶의 지혜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 선물도 아니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이 말해주기도 한다. 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다가도 삶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열려 있는 순간에 스르르 풀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잠깐 스치는 생각 속에 지혜가 앉아 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힘써 채굴할 때가 아니라 단순하게 바라볼 때 오히려 지혜를 선물로 받게 된다. 고요한 모습으로 지혜는 삶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건강을 지키고, 돈과 명예를 좇아 뛰어다닐 수 있고, 일과 사랑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든 최선을 다하되 멈추어 하늘을 볼 줄 알며, 사랑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지혜로운 삶이라 말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시작과 끝이 있다.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이 땅에 한 줌의 흙으로 남게 되는 것이 인생임을 안다면 이처럼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은 주어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희극과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한다. 관객이 되어 다른 사람의 연기에 눈물짓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도 한다. 인생은 덧없는 꿈이며 비극이라고 말한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법칙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고통을 뛰어넘어 사람과 세상을 너그럽게 대하고 담백하게 바라본다. 삶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매일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맞되 오늘 이 순간의 태양을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을 정성으로 살아내야 한다. 무엇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잊어서는 안된다. 한 해의 마지막을 돌아보며 새롭게 다가올 날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일상은 여전히 도전으로 가득할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와 왔다. 그것이 미래를 일구어낼 자원이다. 지금 이 고통의 순간도 반드시 지나간다. 우리 자신은 이미 저 높은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