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세례 요한
기다림의 첫 번째 촛불을 밝히고 있자니 지나간 날들이 스쳐 간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기억들로만 채워지면 좋으련만, 한숨을 부르는 기억들이 또렷하게 줄을 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회개할 것이 많아지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알게 모르게 반복해서 지은 죄며, 남에게 상처를 주고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변명과 핑계를 댄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몇 날이 지나지 않아 허공 속에 사라질 진동에 불과하다.
광야,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세례 요한을 묵상하고 있으면 한없이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의 차림새나 그의 먹거리가 내 앞에 놓여 있는 상보다 화려하지 않고 그가 외치는 소리가 나의 논리보다 탁월하지 않다. 아니 정신의 구조가 어떤지 궁금증을 자아낼 만큼 이상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을 관찰하는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는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 그가 외치고 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으나 불의 앞에서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집도 없이 빈들에 살면서 최소한의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가난하여 절제된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당시의 병든 사회와 종교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되었으며 세상 구석구석에 있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주의 길을 예비했다. 까마득히 먼 옛날 사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인생 여정이었다. 예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 역할에 충실하면서 인간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 사람,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그의 이름 곁에 등장하는 낙타는 물 없는 사막을 여행한다는 점에서 절제와 순종 그리고 인내심을 의미한다. 또한 무릎을 꿇고 짐을 싣기 때문에 겸손을 상징하기도 한다. 세례 요한이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 꿀과 메뚜기로 먹을거리를 대신했다는 것은, 기존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또는 율법학자와 달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렸다는 뜻이다. 광야에서 사람들을 회개시킨 후 헤롯 임금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세례 요한의 모습은 그들의 삶과 대비되어 환하게 빛난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규정한다. 우리의 역사에 미해결된 과제를 남겨둔 채 한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처참하게 죽어 간 이들의 영상이 겹쳐져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국민을 아프게 한 불의한 정치인이나, 날마다 회개해도 부족한 내 모습은, 자신들의 이익에 연연하는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많이 닮아있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청렴의 사람, 자신의 과업을 확신했던 사람, 경계를 넘지 않고 선을 지킬 줄 알았던 사람, 자신이 내야 할 소리에 소홀하지 않았던 사람 세례 요한, 그의 아름다운 삶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은 그의 모습이 주님과 나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예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소망의 절기에 흐트러진 삶의 자리를 정비하고 마음의 옷깃을 다소곳이 여미게 하는 세례 요한은 진정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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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By 안톤 라파엘 멩스 – 1. ngHjvgNHHmV4zA at Google Arts & Culture2. Museum of Fine Arts, Houston, online collection,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59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