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노부부가 아픈 마음을 털어놓는다. 생활비가 바닥이 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들에게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병원비와 각종 공과금, 경조사까지 아들이 다 감당을 해주었기에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한동안 연락이 없다. 스마트폰을 통해 아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골프도 치러 다니고 며느리의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데 집에는 찾아오지도 않고 안부 전화 한 통 없는 것이 서운하고 괘씸한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면서 경제적, 심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무조건의 헌신은 다른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자녀에게 헌신한 부모가 노화로 인해 신체기능이 약화되어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필요로 할 때, 자녀는 자신의 노부모를 돌보는 보호자가 된다. 부모 자녀간의 역할이 전환되는 것이다.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이 크게 증가하면서, 노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기간 또한 장기화되고 있다. 병약한 노부모를 돌보는 일이 가족만이 감당하기에 매우 어렵다는 인식하에 사회적 책무를 제도화한 장기요양제도가 있지만, 실제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노인이 많은 것이 현실이고, 스스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은 자신의 욕구와 상관없이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자녀에게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효도가 인간의 최대 덕목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불효라는 말은 자녀들에게 가혹한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효도인가에 대해 이제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자녀의 효도를 기대하는 부모와 강요된 효도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걸림돌이 되었다. 더구나 자녀가 성장해 결혼을 한 후에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도 자녀의 지나친 냉담함도 일상의 행복을 빼앗는 요인이 된다. 인간의 관계는 가까운 사이에서 더 불행할 때가 많다는 것을 역사나 여러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효도의 절대가치가 퇴색해가는 시대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전통적인 미덕인 효도를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하여 노부모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인식과 태도를 고양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노부모를 대상으로 젊은 세대와 어울려 사는 방법 등을 다루는 교육도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노부모에 대해 불가피하게 발생되는 양가감정을 위해서 부모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기혼자녀들이 서로의 긴장과 부정적인 정서를 함께 나누고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자조모임이나 지지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노부모를 부양하는 자녀의 고충을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전문적인 상담서비스, 부양정책개발 등 사회적인 서비스 체계의 구축 또한 필요하다. 강요는 대체로 사랑하는 마음이나 좋은 동기를 사라지게 하는 성향이 있다. 문을 닫아 거는 이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웃으로 여기고 서로 배려하고 예의를 지킬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한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녀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효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부모의 존재는 결코 지워질 수 없다. 성경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강하게 명령하고 있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상호호혜의 이타적 관계 설정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아들의 처사에 서운함을 호소하는 노부부에게 ‘아들, 많이 힘들지. 엄마가 기도하고 있다’라고 먼저 다가가면 어떻겠냐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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