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좁은 골목에서 고양이게 밥을 챙겨주는 노인의 뒷모습, 떠돌던 개와 새끼들을 집으로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젊은 남성, 병들고 학대받은 동물들을 위해 조용히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 이들의 삶은 뉴스에 오르내리지 않고 세상을 거창하게 바꾸지도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지켜내고 있다. 바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결을 지닌 인간성이다.
‘무해하다’는 말은 단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뜻을 넘어 존재의 방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무해함은 타인의 삶에 조용히 스며드는 태도이며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함께 울어주는 고결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삶은 눈에 잘 띄지 않으며 때로는 무기력하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힘은 생각보다 크고 깊고 단단하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이러한 무해한 존재 방식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이 드라마는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비현실적 배경을 다루고 있지만 안에 담긴 이야기는 놀랍도록 현실적이다. 주인공 해숙은 여든이 넘은 노년의 여성이다. 삶을 마친 그녀는 천국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평온하고 정적인 낙원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다투고 웃고 그리워하고 부엌에서 찌개를 끓이는 일상이 계속되는 곳이다. 천국에서도 해숙은 갈등을 겪고 부부싸움을 하며 누군가를 질투하고 또 누군가를 기다린다. 드라마 속 천국은 삶의 연장선에 있을 뿐 이상화된 종착지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오히려 인간다움이 더 짙게 배어난다. 화해하지 못한 사람을 다시 만나 울고, 사라졌다고 믿었던 존재가 건네는 한마디에 웃고, 젊은 날의 실수를 마주하며 고개를 숙인다. 죽음이 단지 끝이 아니라 인간됨의 거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가던 방식 그대로 존재한다면 지금의 삶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권력도, 성과도, 성공도 의미를 갖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어떻게 살았는가, 누구를 아프게 했는가, 끝까지 무해할 수 있었는가이다. 그러므로 무해함은 단순한 도덕적 선택이나 윤리적 태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해함은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 끝에서 다시 인간다움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보다는, 더 이상 상처를 남기지 않는 삶이 중요하며 더 널리 알려지는 것보다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태도가 더 소중한 것이다. 존재의 결이 조용하고 부드러울수록 오히려 그 가치는 더 단단하게 드러난다. 지금 우리가 소란과 다툼, 경계와 소외 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 귀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며 한 사람의 변화는 무조건적인 존중과 수용 속에서 일어난다고 칼 로저스는 말했다. 그의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보다 먼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무해함은 무능함이 아니다. 존재의 가장 고귀한 형태이며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복음이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우습게도 드라마를 보며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누군가의 인생에 상처가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를 떠올릴 때 불편한 기억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살아내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 보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묻자. 무해함, 그 조용하고도 강한 존재 방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선택이며 천국보다 아름다운 지금을 살아내는 하나의 위대한 길이다.
김화순 소장∥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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