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뉴스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졌다. 전쟁, 산불, 폭우, 붕괴 사고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가끔은 고통스러운 소식이 너무 많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비극이 감당하기 어려워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공감 피로(empathy fatigu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생기는 감정적 탈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냉소와 무감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우리는 남의 고통에 무뎌지지 않으셨던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통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며 오히려 더 깊이 아파하셨고, 눈물을 흘리셨고, 무너진 사람들의 곁에 머물러주셨다. 고통을 당장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고통의 곁을 지키는 존재셨다.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의 태도이다. 신앙은 결국 세상에 없는 방식으로 아파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상처가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면 일시적으로 슬퍼하고 분노하고 또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은 식고 사건은 어느새 소리도 없이 기억에서 지워진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며 조금씩 덜 민감해지고 덜 아파하고 덜 반응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러한 무관심은 심리적 보호기제의 하나이다. 너무 많은 비극 앞에서 생존하기 위해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슬픔을 방치하면 인간다움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슬퍼하지 않는 사회는 공포를 정상화하고 불의에 익숙해지며 고통을 사적인 영역의 문제로 가두어버린다. 그 틈에서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능력은 더 큰 공동체의 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져 버리고 만다. 이때 교회는 기억의 공동체, 눈물의 공동체로 다시 서야 한다. 동정이 아닌 진정으로 함께 울 줄 아는 영성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
말씀은 언제나 고통의 자리로 우리를 부른다. 일상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타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삶의 파편을 응시하라는 부름이다. 자주 보지 않으면 슬픔을 잊는다. 자주 잊으면 연민이 낯설어진다. 연민이 낯설어지면 결국 사람의 얼굴을 잃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곁으로 이끄신다.
산불로 모든 것을 잃은 노부부가 집터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기자의 카메라를 보며 어색하게 웃으려는 모습은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사진 작가가 쓴 한 줄의 글이 기억난다.
“나는 셔터를 누르는 손이 너무 무거웠다. 할 수 있는 건 이 장면을 잊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잊지 않도록,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가는 이들의 손을 놓지 않도록, 다시 기도하며 다시 곁에 서는 일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이다.
무수한 말의 시대를 지나 다시 눈물의 시대를 통과하는 지금, 우리는 누구보다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파할 수 있는 마음, 멈춰 설 수 있는 용기,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의 흔적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누군가의 곁에 있어 주었음에 감사할 날이 올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이 내 삶을 다시 일으켜줄 날도 올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그 마음을 품고자 한다. 타인의 슬픔 앞에 멈춰 서는 일이야말로 믿음이 움직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김화순 소장∥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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