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끝에서 몇 걸음

  터널 끝에서 이제 겨우 몇 걸음 걸어 나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완전히 밝은 곳에 선 것도 아니고 아직 어둠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닌 자리다. 숨쉬기는 조금 편해졌지만 몸에는 아직 긴장이 남아 있어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몇 달 전 이 내담자가 처음 상담실을 찾아왔을 때, 그는 의자 끝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삶에 앉아 있지 못한 사람들

  상담실에서 사람을 마주하다 보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그 사람이 자기 삶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누가 보아도 반듯한 인상의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랬다. 말끔했다. 옷차림도 말의 속도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질문을 던지면 잠시 생각한 뒤 정리된 문장으로 대답했다. 감정은 있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이중적인가

  자기 모순을 마주하는 순간만큼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경험도 드물다. 말로는 그렇게 믿는다고 해놓고 정작 상황이 닥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생각과 말, 신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들이다. 우리는 대개 그 불일치를 적당히 봉합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자녀나 가족 앞에서는 봉합이 쉽게 풀려버린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가장 숨기고 싶던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AI의 자리 사람의 자리

  ‘돌본다’라는 말이 요즘처럼 무게감 있게 다가온 적이 있을까. 가족으로부터 시작해 가까운 지인, 상담의 구조,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이 돌봄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하기에 누가 누구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무거운 숙제처럼 다가온다. 심리 및 정신건강 분야에 인공지능(AI)의 역할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불안을 예측하고, 우울 점수를 계산하며, 자살 위험 신호를…

배려라는 이름의 침묵

  일상에서 종종 망설이게 되는 사소한 순간이 있다.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을 때이다. 그 망설임은 대개 배려라는 이름으로 시작된다. 괜히 무례해 보일까 봐,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될까 봐,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것은 상대를 보호하기보다는 내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한 결정인 경우가 많다. 말해주는…

공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짧은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급한 연락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확인해야 할 문자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 몇 초 동안의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는 상태, 아무 자극도 없는 순간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장면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로 시작되지만 독자가 멈칫하게 되는…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

  흔히들 결정장애라는 말을 한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미루는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며,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정하지 못하고 보류하고 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는 미완성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결론에도 장애라는 말을 붙이나 싶어 간과하고 흘려보내던 단어였지만, 마음의 임시 거처에 놓여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말이 사용되는 이유를 다시…

기억은 어떻게 오늘을 만드는가

  성탄이 다가오면 자연스레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교회에 모여 성탄 축하 발표회를 준비하던 기억들, 잘되지 않는 영어 발음으로 캐롤을 부르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얼굴들, 사회를 맡아 손에 땀을 쥐고도 태연한 척 애쓰던 순간, 집집마다 다니며 새벽송을 부르고 간식거리를 한 바구니씩 얻어 쌓아두고, 으레 꼬박 밤을 새우며 성탄의 새벽을 맞이하곤 했다. 그때의 성탄 행사는 지금보다…

살아버린 날들은 수정이 안되지만

      살면서 몇 번이나 되뇌이는 말이 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정말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기쁨보다 고통이 유난히 컸던 날들,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했던 시간들, 마음속에서 수없이 고쳐 쓴 장면들. 삶은 편집의 권한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살아버린 날들은 수정도, 삭제도 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