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선교사 부부가 동남아시아의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무리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현지인들은 따뜻했고 아이들도 나름 잘 적응해 갔다. 파송 교회와는 화상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선교지 상황을 보고하고 사진도 올리고 기도 제목도 나누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그런데 아내 선교사가 상담 자리에서 이렇게 마음을 쏟아 냈다.
“여기서도 저는 손님 같고요. 한국에 가면 또 방문객 같아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느낌이에요.”
이 말 속에는 선교사의 이주가 만들어내는 첫 번째 균열이 담겨 있다. 몸은 한 나라에 있지만 정서적 뿌리는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다. 현지에서는 아직 그 나라 사람들이 하는 농담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국에서는 이미 일상의 흐름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 SNS 속에서 모교회 사진을 보면 반갑다가도 묘하게 서운해진다. ‘나는 더 이상 저 자리에 없구나’ 하는 감정이 올라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가족치료학자 Pauline Boss는 이 상태를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 불렀다. 분명히 떠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남아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경험하는 상실이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거나, 몸은 곁에 있지만 정서적으로 멀어진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고국은 멀어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고, 현지 공동체는 곁에 있지만 아직 깊숙이 들어와 있지는 못한 상태다.
일반적인 상실에는 장례가 있고, 작별 인사가 있고, 끝이라는 경계가 있다. 그러나 모호한 상실에는 장례식도 없고 끝이라는 선언도 없다. 그래서 애도는 미뤄지고, 정체성은 서서히 흔들린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나는 지금 누구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이 관계의 표현 아래에서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이 감정은 국경을 넘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혼 12년 차 부부가 있다. 남편은 최근 부서 이동으로 바빠졌고 아내는 아이들 교육 문제로 예민해졌다. 큰 싸움은 없다. 일상도 그대로 유지된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요즘 무슨 이야기를 했지?’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부부의 대화에 감정보다 일정이 더 많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학원비 보냈어?”, “내일 늦어.”
남편은 집에 있다. 떠난 것이 아니다. 아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예전의 다정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호한 상실이다. 관계는 유지되지만 정서적 연결은 희미해진 상태, 몸은 곁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멀어진 상태다. 서로 주고받은 사소한 말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질문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이 사람에게 중요한가. 우리는 아직 서로의 편인가.
이 질문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예민해지고, 상대의 표정과 말투를 과도하게 해석한다. 잠은 얕아지고 피곤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괜시리 마음이 가라앉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어떤 이는 자꾸 확인하려 들고, 어떤 이는 아예 마음 문을 닫아 버린다.
모호한 상실은 명확한 종결이 없기 때문에 애도가 멈추고, 그 미완의 슬픔이 만성적 긴장을 불러온다. 그 긴장은 우울과 불안, 자기 의심의 형태로 일상에 스며든다. 끝난 관계는 한바탕 울고 나면 정리라도 되지만, 애매하게 식어가는 관계는 매일 조금씩 마음을 갉아먹는다.
선교사가 두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모호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정체성은 조금씩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한 문화가 사라지고 다른 문화가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함께 자리 잡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상실을 부정할 때는 더 흔들리지만, 상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넓어질 여지가 생긴다.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놓치고 있던 변화 속에 서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된다. 관계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슬픔이 놓여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옆에 있는데 멀게만 느껴진다면, 사랑이 사라졌다고 서둘러 말하기 전에 한 번쯤 멈추어 보자.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그 상실을 서로에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김화순 소장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심리상담센터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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