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자기 모습에 반해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말도 자기애가 과도한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이 되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한 이야기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연못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바라본 것은 물에 비친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흔들리고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것.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어떤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직접 바라보는 데 서툴렀다. 늘 무언가를 통해 확인하려 했다. 타인의 시선, 칭찬, 성취, 역할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삶의 일부이지만 때로는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화제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목만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묘한 불편함이 숨어 있다.
서울 자가, 대기업, 김 부장
세 단어는 김 부장을 설명하는 정보처럼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조건들이다. 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단어가 나란히 놓이는 순간 설명보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안정된 삶, 사회적 인정, 성공한 중년의 얼굴이다.
정작 제목 안에는 김 부장이 없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지, 무엇 때문에 잠 못 이루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방식에 지나치게 익숙하다. 사람을 만날 때도 어디에 사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도 그렇게 자신을 설명한다.
승진하고도 불안한 사람들이 있다. 어렵게 집을 마련하고도 안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원하던 자리에 올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다음 것을 걱정한다.
승진하면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곧 다음 평가가 걱정된다. 집을 마련하면 안정될 줄 알았는데 미래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인정받으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인정이 필요해진다.
유능감은 묘한 성질이 있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제의 성취는 금세 익숙해지고 어제의 칭찬은 금세 빛을 잃는다. 그래서 다시 확인받고 싶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연못 위에 올려두고 있다는 데 있다. 직업, 성취, 역할, 타인의 인정. 그것들은 삶의 일부인데 어느 순간 우리를 대신하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얼굴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물가를 서성인다.
연못이 흔들리는 순간 사라지는 것은 정말 나일까. 아니면 내가 나라고 믿어왔던 얼굴일까. 나르키소스가 죽은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다. 연못 밖의 자신을 끝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화순∥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심리상담센터 엔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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