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함이라는 인간의 가능성

  도시의 좁은 골목에서 고양이게 밥을 챙겨주는 노인의 뒷모습, 떠돌던 개와 새끼들을 집으로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젊은 남성, 병들고 학대받은 동물들을 위해 조용히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 이들의 삶은 뉴스에 오르내리지 않고 세상을 거창하게 바꾸지도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지켜내고 있다. 바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결을 지닌 인간성이다. ‘무해하다’는 말은 단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뜻을 넘어 존재의 방식에…

목회자의 길을 다시 묻는다

  완연한 봄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각 연회마다 목사안수식이 이어지고 있다. 고요한 경건의 예식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무릎을 꿇고 안수받는 장면은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 모습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교회의 미래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는 순간이 된다. 그 자리에 선 이들은 말없이 다짐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저마다의 기도를 가슴에 품는다.…

생명을 살리는 손, 영혼을 돌보는 손

  우리 사회는 중증외상 전문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이고 심각한 의료 위기 앞에 있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중증외상 전문의 수련센터가 예산 부족으로 운영 중단 위기에 처했다가 서울시의 긴급 지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면한 사례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증외상 전문의는 대형 사고나 재난에서 위급한 환자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필수적 의료인력이지만 열악한 근무환경과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인해…

조용한 공범들

  얼마전, 초등학생이 교사에 의해 살해당한 비극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지만 동료 교사들이나 학교 측이 보인 태도는 또 다른 질문을 갖게 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대처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러운 거리두기와 미온적 반응은 어쩌면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온정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었을까. 비극을 방지할 수 있었던…

타오르고 사라져도 남는 것들

봄이 왔건만, 꽃보다 먼저 검은 연기가 피었다.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주변 지역으로 번졌고 영덕과 울진, 청송, 안동 등 낯익은 이름의 마을들이 잿더미로 바뀌었다. 삶의 터전인 집들이 무너졌고 논과 밭, 산, 문화재들까지 불길은 가리지 않고 삼켜 버렸다. 이웃을 살리기 위해 다시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간 소방대원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불이 꺼진 자리에 남은…

판결은 순간이지만 공존은 계속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요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지면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고 누군가는 깊은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법적 판단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과 삶의 방향이 걸린 문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긴장하고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뉴스…

너무 쉽게 적을 만들지 마라

    가까운 사람과 의견이 다를 때 느껴지는 불편함은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부부, 연인, 가족이나 오랜 지인과 대화하다 보면 생각이 엇갈려 어색한 침묵이 흐르거나 감정이 상하는 순간이 온다. 사소한 차이가 가치관의 충돌로 번지고 서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쌓이면 거리감이 생긴다. 정치적 입장, 사회 문제, 신앙적 태도처럼 삶의 중요한 부분에서 견해가 다를 때, 상대를 있는…

가시덤불을 넘어 생명의 정원으로

  오래된 정원에 서 있었다. 한때 아름다운 꽃과 건강한 나무들로 가득했던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갔다. 가지들은 엉켜버렸고 일부 나무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기 시작했다. 가시는 본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 가시는 다른 나무들의 성장을 막고 새들이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원은 더 이상 생명을 품는 곳이 아니라 고립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한때…

닿지 않는 것 같은 진심에 대하여

진심을 다하면 결국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 상처받은 내담자가 변할 수 있도록,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한 회기 한 회기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내담자의 분노와 방어를 감내하며 언젠가는 그 벽이 무너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반드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와의 관계를 신뢰했던 만큼 상처가 깊을 수도 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내담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