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례가 끝난 뒤였다. 조문객들이 돌아가고 빈소에 남은 물건들을 정리할 때까지 그는 거의 울지 않았다.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했고 장례 절차를 확인했으며 멀리서 온 친척들의 식사와 숙소까지 챙겼다. 주변에서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잘 버틴다고 여겼다.
장례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고인의 휴대전화를 충전기에서 빼는 순간 화면이 켜지며 익숙한 사진이 나타났다. 그 순간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왜 그제야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많이 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견뎌야 할 일이 너무 많으면 슬픔은 잠시 뒤로 밀려나게 된다. 울기 시작하면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고,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을 더 단단히 붙잡는다.
가족을 잃은 뒤 장례를 책임져야 했던 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고도 아이들을 돌봐야 했던 이, 큰 충격을 받은 다음 날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해야 했던 이에게서 이런 모습을 만나게 된다. 주변에서는 씩씩하다고 말하고 본인도 잘 견디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다 사소한 순간에 무너진다. 함께 쓰던 컵을 보았을 때, 익숙한 음식 냄새가 났을 때, 무심코 전화를 걸려다가 더는 받을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눈물이 찾아온다.
슬픔은 큰일 앞에서는 오히려 멈추어 있다가 작은 틈을 만나 흐르기도 한다. 마음이 안전해졌을 때,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을 때, 이제는 무너져도 괜찮다고 느껴질 때 모습을 드러낸다. 뒤늦은 눈물은 붙들고 있던 감정을 비로소 내려놓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도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곤 한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으면 정이 없는 듯 바라보고, 너무 오랫동안 울면 아직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누군가에게는 “이제 그만 잊어야지”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왜 슬퍼하지 않으냐”고 재촉한다. 슬픔은 그렇게 주변의 기대에 맞추어 증명해야 하는 감정이 되기도 한다.
애도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누군가는 떠난 이를 이야기하며 곧바로 울지만 누군가는 몇 달 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계절이 바뀌는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눈물보다 분노를 먼저 느끼기도 하고, 몸의 통증이나 피로로 슬픔을 앓기도 한다. 같은 이의 마음에서도 괜찮은 날과 견디기 어려운 날이 번갈아 찾아온다. 마음은 달력처럼 반듯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의 언어도 때로 슬픔을 서두르게 만든다. 좋은 곳에 가셨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말,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말은 모두 선한 마음에서 건네졌을 테지만, 그런 말이 너무 이르면 상실을 겪은 이는 눈물을 감추게 된다. 믿음이 부족해 보일까 염려되어 괜찮은 얼굴을 하고, 위로받기 전에 먼저 신앙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시편에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탄식이 넘쳐 있고,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 곁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죽음 이후의 소망을 알고 계셨지만 눈앞의 슬픔을 건너뛰지 않으셨다. 함께 우는 시간 또한 믿음 안에 머물 자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울지 못하는 이에게 눈물을 요구하지 않고, 뒤늦게 우는 이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재촉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애도의 시간을 지켜준다. 장례가 끝나도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돌아가고 일상은 다시 시작되지만, 남겨진 마음에는 그제야 울 시간이 찾아온다. 멈추어 있던 눈물이 흐르면서 마음은 조금씩 자신이 겪은 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눈물에도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올 때까지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것, 애도하는 이에게 우리가 건넬 가장 깊은 위로는 아마 그런 기다림일 것이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