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 「오디세이」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다. 놀란 감독이 원작과 다르게 그려낸 칼립소의 꽃잎 장면이다. 칼립소가 건넨 꽃잎을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희미해진다. 전쟁과 죽음,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오디세우스에게 그보다 달콤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픈 기억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 페넬로페도, 아들 텔레마코스도, 고향 이타카도 희미해져 간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던 사람이었는지조차 흐릿해진다. 고통을 잊는 동안 돌아갈 길까지 잊어간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살다 보면 잊어야 견딜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는 기억, 수치심이 밀려오는 경험,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관계가 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본능적으로 기억에서 멀어지려 한다. 이를 회피나 억제, 때로는 정서적 마비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일에 몰두하고, 쉴 틈 없이 사람을 만나고, 술이나 쇼핑, 게임, 짧은 영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교회 봉사와 사역으로 하루를 채운다. 행동은 제각각이지만 그것을 멈추었을 때 견디기 힘든 무엇인가가 올라온다면 질문은 달라진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지 않으려고 이렇게 바쁜 걸까.’
우리를 붙잡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이 우리를 한 자리에 붙잡아두기도 한다. 칼립소의 꽃잎처럼 말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당장은 편하고, 지난 일을 꺼내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픈 기억만 골라서 닫아두는 일에 그리 능숙하지 못하다. 슬픔을 밀어냈는데 기쁨에도 무덤덤해지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다가 깊은 관계까지 어려워지기도 한다. 실패를 떠올리지 않으려 새로운 시도를 피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했던 사람인지도 흐릿해질 수 있다.
상담에서 과거를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억을 없애는 것과 기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다 잊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에서 몸이 긴장하고, 사람을 밀어내고, 작은 일에도 두려움이 올라온다면 기억은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치유의 과정에서는 기억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 일이 나라는 사람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그 기억을 가지고도 다른 선택을 해보는 것이다.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도 그 안에 들어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모두 지운다면 그 시간을 살아낸 나까지 함께 희미해질 수 있다.
성경이 거듭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 새롭게 들린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시간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이끌어내셨는지를 기억해야 했다. 유월절의 식탁에서도 그 이야기를 되새겼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누구인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회복은 그 일을 기억해도 이전처럼 끌려가지 않고, 아팠던 일을 말하면서도 지금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기억을 품되 앞으로의 삶까지 그 기억에 맡기지는 않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칼립소의 섬은 머물고 싶을 만큼 평안했다. 그 평안이 오히려 위험했다. 떠나야 할 이유까지 잊게 해주었으니까.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꽃잎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하지 않아도, 느끼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것, 당장은 편안하지만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흐릿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가끔은 자신에게 물어보아도 좋겠다. 나는 무엇을 잊은 채 편안해지려고 하는지, 그것을 잊으면서 함께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오디세우스가 다시 집으로 향하기 위해 먼저 되찾아야 했던 것은 배도, 무기도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기억이었다.
김화순∥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