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상예술대상에서 유해진 배우가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왕의 남자]를 통해 그의 연기력에 그저 감탄했던 나로서는 배우에게 주어진 상이 당연하다 여겨진다. 동시에 영화 속 엄흥도가 단종에게 던진 “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라는 말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단순히 충성이나 관계에 대한 말처럼 들렸다. 시간이 지나며 이 대사가 다르게 들렸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배제되는 느낌이다.
나는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에 포함된 사람입니까?
모든 것을 잃은 왕에게 삶은 더 이상 이어갈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하는 순간, 곁에 있던 이는 그 이유 속에 자신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관계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지점에서 갈라지게 된다. 함께 있는가, 아니면 나는 빠져 있는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질문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주 생겨난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다. 새벽마다 문을 열었고, 식당 봉사를 했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돌봤다. 교회가 어려울 때는 자기 일처럼 뛰어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전처럼 찾지 않는다. 회의에서도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줄어든다. 이름은 남아 있는데 자리는 사라져간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공동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서 떠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은 생각보다 관계의 온도에 민감하다. 특히 교회는 사랑을 말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세상에서는 상처받아도 나름 견딜 수 있다. 원래 경쟁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느끼는 배제는 조금 다르다. 사랑받을 것이라 기대했던 자리에서 밀려나는 경험은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눈치를 본다. 내가 도움이 될 때는 찾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잊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직분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거리감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플 때보다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외로워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교회가 사람을 존재로 보기보다 역할로 기대할 때 생기는 일들이다.
물론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관계보다 기능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다. 누가 더 잘하는지, 누가 더 필요한지, 누가 더 효율적인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 자체는 쉽게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조차 존재 증명의 방식이 되기 쉽다. 더 열심히 봉사해야 하고, 더 필요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계속 호명되는 사람이어야 안심이 된다. 섬김이 기쁨이 아니라 불안의 해결 방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십자가 이후 제자들도 어쩌면 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뒤 그들은 스스로 관계 밖에 있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베드로는 더 그랬을 것이다. 가장 큰소리쳤던 사람이 가장 처참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신다. 실패한 사람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신다. 이미 끝났다고 여긴 사람들에게 다시 말을 건네신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사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배제된 사람을 다시 관계 안으로 초대하는 사건처럼 보인다. 너는 끝난 사람이 아니라고, 여전히 함께 갈 사람이라고.
교회는 원래 그런 공동체였다. 쓸모 있는 사람들만 남는 곳이 아니라 넘어지고 실패한 사람도 다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 우리는 사람을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할로만 기억하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오래 함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는 묻고 있다. “저도 아직 그 안에 있습니까.”
김화순∥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심리상담센터 엔,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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