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유독 조용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 소란스럽지 않으면 괜찮은 줄 안다. 언성이 높아지지 않았고 누군가 울지 않았기에 상황이 안전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어떤 부조리는 거창한 음모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조용한 사람들 속에서 자라난다. 온정주의는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정죄보다 이해를, 단죄보다 수용을 선택하는 태도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처럼 보인다. 특히 우리 사회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중시하기에 직접적인 표현이나 개입을 꺼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지만 그 온기가 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습관으로 굳어지는 순간, 공동체는 병들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잘못을 덮고 불편한 진실을 넘기며 문제 제기자를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고통은 더 오랜 기간 지속된다. 교회는 언제나 사랑과 용서를 중심 가치로 삼아왔다. 그러나 그 사랑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문제를 덮는 도구가 될 때, 본질에서 멀어지고 만다. 진정한 돌봄은 무조건 감싸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함께 감당할 용기를 기르고 진실 앞에 함께 서는 것이다. 온정주의가 공동체의 피상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돌봄의 형태를 갖춘 회피일 뿐이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고통이 있다. 자신은 분명히 상처를 받았는데 그 누구도 상처를 언어화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를 말한 순간부터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상대방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이해를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점점 목소리를 잃고 조용히 고립되며 자신이 틀린 것이라 자책하게 된다.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 그리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공동체는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고 만다. 이런 구조 안에서 상처는 반복되고 고통은 전염된다. 목회자나 리더, 돌봄을 담당하는 이들은 단순한 조정자가 아니라 진실을 견디는 영적 안내자여야 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진실 앞에 함께 서는 태도야말로 돌봄의 본질이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짜 위로자가 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침묵이 낳는 평화는 진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불의와 고통에 대한 조용한 동조이며, 고통을 외면한 데 대한 무거운 책임이기도 하다. 갈등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조용히 넘기는 방식은 결국 더 큰 단절을 낳는다. 우리는 그 단절을 외면한 채 살 수 없다. 언젠가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통은, 누구도 나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진짜 공동체는 듣는 일에서 시작된다. 듣되, 쉽게 판단하거나 정해진 문장으로 위로하지 않고 함께 머물러 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반드시 진실을 포함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품위 있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평화를 가장한 침묵보다 고통을 나누기 위한, 진실을 감당하겠다는 단단한 자세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때론 가장 은밀한 공범이다.
김화순 소장∥심리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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