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내 인정받지 못한 마음들
상담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한동안 바닥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잠시 후 말을 고쳤다.
“아니요…제가 당한 만큼 똑같이 겪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오랫동안 부당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억울함을 이야기했지만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냈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자신만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뜻밖이었다.
“사실은…누군가 한 사람만이라도 제 이야기가 사실이었다고 말해주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가 원했던 것은 처벌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혼나게 하고 싶어요.”, “망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만,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상처가 인정받았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이제는 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라는 말을 하게 된다.
사람은 처벌보다 먼저 자신의 아픔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요즘 드라마와 웹툰에는 학교폭력, 정치 권력, 조직의 부패를 다루는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사람이 등장해 법보다 빠르고 제도보다 강한 방식으로 악인을 무너뜨린다.
사람들은 그런 장면을 보며 “속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서도 저렇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왜 우리는 정의의 승리보다 처단을 더 기다리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폭력을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누군가가 대신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라게 된 것은 아닐까.
이 감정은 이제 드라마를 넘어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참교육, 박살, 처단, 폭로, 나락 등. 유튜브 알고리즘은 가장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을 배운다.
차분한 설명보다 단죄가 더 많은 관심을 얻고,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댓글은 이미 판결을 내려버린다.
물론 학교폭력도, 권력형 비리도, 사회적 갑질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을 처벌하는 데는 익숙해지면서, 왜 그런 폭력이 반복되는지는 점점 덜 묻게 되는 것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일은 쉽다. 그러나 학교를 바꾸고, 정치를 바꾸고, 폭력이 자라나는 문화를 바꾸는 일은 훨씬 어렵다. 그래서 처단은 한 사건을 끝낼 수는 있어도 같은 문제를 끝내지는 못한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도 사람을 바꾸기 전에 먼저 존재를 받아들이셨다. 이름을 불러 주셨고,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며, 외면당한 사람 곁으로 먼저 다가가셨다.
변화의 핵심은 정죄보다 먼저 건네진 존중과 따뜻한 만남이었다.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정말 정의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처단이 내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그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모습의 사회를 향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 되찾아야 할 것은 처단할 힘이 아니라, 정의를 믿을 수 있다는 희망인지도 모른다.

김화순 목사(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장, 중앙연회 상담센터 엔 소장)
※본 칼럼은 실제 상담 장면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으며,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사례의 일부 내용을 각색하였음.
출처 : weekly기독교타임즈(https://www.kmc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