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은 원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몸이 좋지 않았던 날이었다. 일찍 들어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남편은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귀가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서운함보다 화가 났다. 아프다는 말을 듣고도 늦게 온 것을 보면 자신은 남편에게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남편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퇴근 직전 처리해야 할 문제가 생겼고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렇다고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행동까지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늦게 들어왔다’는 사실과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판단,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다’라는 결론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 세 단계를 놀라울 만큼 빠르게 연결 짓는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의 영향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 같은 내적 특성을 원인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한다.
내가 약속에 늦으면 차가 막혔거나 앞선 일정이 길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늦으면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 피곤했기 때문이고, 상대가 그러면 배려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연락하지 못하면 바빴던 하루가 있었고, 상대가 연락하지 않으면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내 행동을 둘러싼 사정을 알고 있지만 상대의 하루는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정과 말투, 행동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상황보다 눈앞의 행동으로 사람을 설명하기가 쉽다.
문제는 행동에 대한 해석이 어느 순간 사람에 대한 판결이 될 때다. ‘오늘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가 ‘내 말에는 관심이 없다’가 되고, 다시 ‘이기적인 사람이다’로 굳어진다. 한번 만들어진 판단은 이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비슷한 행동은 쉽게 눈에 들어오고 반대되는 장면은 예외처럼 지나치기 쉽다.
“당신은 항상 그래.”
부부싸움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말에는 과거의 비슷한 장면들이 한꺼번에 불려 나온다. 지금 무엇이 서운했는지를 이야기하던 대화는 어느새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결하는 싸움이 된다.
그래서 사실과 해석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귀가했다’는 사실이고,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는 그 사건에 부여한 의미이며, ‘남편은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다’는 상대에 대한 판단이다.
이 셋을 구분한다고 서운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원래 이기적이야”라고 하면 상대는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아프다고 했는데 연락 없이 늦게 들어왔을 때, 내 어려움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어”라고 하면 다루어야 할 행동과 감정이 남는다. 사람과 행동 사이에 너무 빨리 등호를 놓지 않는 것이다.
교회나 일상의 장면에서도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난다.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간 사람을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회의에서 내 의견에 반대한 사람을 ‘나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한두 번의 행동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고 때로는 신앙과 인격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에 좋은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복되는 무책임과 실제적인 무례함도 있고, 폭력이나 학대처럼 분명한 경계와 대응이 필요한 행동도 있다.
필요한 것은 결론을 조금 늦추는 일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질문에 성격으로 곧장 답하기 전에 ‘내가 아직 모르는 상황은 없을까’를 남겨두고, 지금 내가 아는 것과 해석한 것을 구분해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 상처받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설명하고 싶어진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차갑다고 이름 붙이면 복잡했던 상황이 금세 이해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을 설명하는 말이 때로는 그 사람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성경이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을 모든 판단을 포기하라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행동을 분별하고 때로는 분명한 경계를 세워야 한다. 다만 사람의 일부를 보고 그 사람 전체를 너무 빨리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이유를 찾아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과 아직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 작은 여백을 남겨두는 일일 수 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결론을 조금 늦추는 것, 그 여백에서 다시 물어볼 것이 생기고 때로는 관계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김화순 목사(중앙연회 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본 칼럼은 실제 상담 장면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으며,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사례의 일부 내용을 각색하였습니다.>
출처 : weekly기독교타임즈(https://www.kmc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