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를 떠나보낸 지 일 년이 지난 60대 남성의 상담은 뜻밖에도 여행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힘들었지만 이제는 식사도 챙기고 사람들도 만난다. 주변에서는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참 동안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화면에는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이 나오고 있었다.
은퇴하면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던 곳이다. 두 사람은 여행책을 펼쳐놓고 어느 계절에 떠날지, 어떤 도시에서 머물지 이야기하곤 했다. 아내가 떠난 뒤에도 책은 버리지 못했다. 혼자서라도 다녀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혼자 가는 순간 아내와의 약속마저 끝내버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꿈꾸던 여행은 이제 이룰 수 없었다. 함께했던 날들만큼이나 함께하지 못하게 된 날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우리는 누군가 상실을 겪으면 무엇을 잃었는지부터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 건강, 일자리처럼 삶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상실에는 함께 늙어갈 시간, 언젠가 나누기로 했던 대화처럼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애도 상담에서는 상실 이후 삶의 의미를 다시 구성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지나온 삶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상실한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려면 무엇을 잃었는지만큼 무엇을 바랐는지도 들어봐야 한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길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예수님의 죽음 이후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바랐노라.’ 헬라어 원문에서 이 말은 과거에 지속되던 기대를 나타낸다. 한순간의 바람이라기보다 그 기대를 품고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던 미래를 그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기대를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장면에는 역설이 있다. 희망이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제자들 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걷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무너진 기대를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물으신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대와 실망을 털어놓은 뒤에야 성경을 풀어주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함께 식탁에 앉아 떡을 떼실 때였다.
상담실에서도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이 함께 살려고 알아보던 집이나 손주가 태어나면 해주고 싶었던 일로 이어지곤 한다. 남겨진 사람은 그런 계획을 떠올릴 때마다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된 삶의 한 부분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런 슬픔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권하곤 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보라거나 취미를 만들라고 한다. 도움이 되는 권유일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어떤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이야기를 물으셨듯, 위로에도 상대가 무엇을 바랐는지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미래를 이야기하는 일이 아직 슬퍼하지 못한 미래를 덮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 여행책은 아내와 함께 꿈꾸던 노년의 흔적이었다. 책을 정리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애도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에게 여행은 아내와 함께 살아갈 날들을 약속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기대했던 미래는 그들이 생각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그대로 되돌려주기보다, 자신들이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하셨다. 그렇다고 모든 상실 뒤에 반드시 새로운 기쁨이 찾아온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상실을 겪은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더라도 이전의 삶을 잊거나 이루지 못한 기대를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실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릴 때보다 함께 맞이할 줄 알았던 내일을 생각할 때 선명해진다. 그 슬픔은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고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상실을 겪은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은 새로운 내일을 보여주기에 앞서, 기다렸으나 끝내 맞이하지 못한 내일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일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 글의 사례는 상실과 애도에 관한 상담 경험과 전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하였으며, 등장인물과 구체적인 상황은 이해를 돕기 위해 설정하였습니다.>

김화순 목사(중앙연회 상담센터 엔, 한국감리교선교사상담센터 소장)
출처 : weekly기독교타임즈(https://www.kmctimes.com)







